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본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현 명지대 명예교수가 이북의 금강산을 예찬한지 10년 만에 펴년 제6권의 표제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였다. 대학에서 미학과, 대학원 미술사학과 동양철학을 전공한 兪교수는 문화유산 답사에 연륜이 쌓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득 떠오른 경구로 ’인생도처유상수‘를 삼았는데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무수한 상수(上手)들의 노력들이 있었고, 그것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자신이 따라가기 힘든 고수(高手)들이었으며,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필부 또한 인생의 상수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인생도처유상수’라고 느낀 문화유산의 과거와 현재를 액면 그대로 전하면서 답사기를 엮어가면, 굳이 조미료를 치며 요리하거나 멋지게 디자인하지 않아도 현명한 독자들은 알아서 헤아리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조금만 길을 나서면 도처에 걸어서 좋은 길들이 널려 있다. 어느 걷기 길 단체에서 통계를 내 본 결과 전국에 산재해 있는 길의 수효가 1,68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필자가 3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 인구 110만 명의 고양특례시 안에도 2013년에 개통한 14개 코스, 114㎞의 고양누리길이 있어서 2017년 1월부터 현재까지 통산 12차 종주를 하고 있는 중이다.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지역의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지만 기왕의 있는 길들을 연결해서 만든 장거리 트레킹 코스 개발 또한 최근의 추세이다.
서울․경기 수도권을 예로들면 도내(道內) 15개 시․군을 연결해서 만든 경기둘레길은 크게 경기 평화누리길 구간, 경기 숲길 구간, 경기 물길 구간, 경기 갯길 구간으로 나누어서 첫 번째 경기 평화누리길 구간은 2010년 5월 8일에 개통했던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을 선형으로 경기도 평화누리길을 그대로 연결했고 두 번째 경기 숲길은 연천군, 포천시, 가평군, 양평군 등에 있는 양평 물소리길과 같이 산악지역의 임도 중심의 숲길이 다수 분포되어 연결되었으며 세 번째 경기 물길은 여주시, 이천시, 안성시 3개 시(市)에 있는 여주 여강길 등 남한강, 청미천, 석원천, 금산천, 안성천, 용설지, 금광지 등의 수변 공간을 다수 경유하는 ‘물길’로 조성되어 있고 네 번째 마지막 경기 갯길은 가장 긴 261㎞로서 평택시, 화성시, 안산시, 시흥시, 부천시, 김포시 등 갯벌 관련 테마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800㎞보다더 60여 ㎞가 더 긴 경기둘레길을 재작년에 1차 종주를 끝내고 목하 2차 종주 중이며 그보다 2년 여 전에는 코리아둘레길(남쪽의 한반도둘레길) 중 가장 먼저 개통했었던 해파랑길을 1차 종주한 바 있는 필자는 연 이어서 개통한 바 있는 남파랑길(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 ~ 전남 해남 땅끝마을)과 서해랑길(인천 강화 평화전망대 ~ 전남 해남 땅끝마을)과 아직은 미개통이지만 노선의 거의 확정된 DMZ평화의 길(인천 강화 평화전망대 ~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합치면 무려 4,350㎞에 달하는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되어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장거리 트레킹 코스가 마련되는 것이다.
최근에 코리아둘레길 완보자 간 교류 활성화를 통해 코리아둘레길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에서 코리아둘레길 완보자 클럽(Great Kodullers : 약칭 'GKO')을 발족하였는데 영광스럽게도 필자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 선출되었다.
지난 5월 11일(토)은 오전부터 먹구름이 끼어 있고 코리아둘레길 완보자 클럽(이하 ‘지코(GKO)'라 한다) 발족식은 오후 1시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대로 470번길 18-1에서 갖기로 했는데 불행히도 전국적으로 오후부터 많은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그래도 공식행사였으므로 (사)한국의길과문화 洪 이사장, 吳 실장, 潘 대리 STAFF과 부산, 울산, 거제, 남해, 원주, 경기 수원 등지에서 코리아둘레길 완보자들이 속속 모여 들어 지코(GKO) 회원가입규약 의결, 클럽의 운영 방향 및 사업, 온라인커뮤니티 개설․운영 방안, 정기모임 시기 및 장소, 클럽 홍보 방안 등을 논의한 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가운데 서해랑길 제102코스(=강화나들길 제16코스)를 단체도보하기 위해 출발지인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선착장까지 뉴 카운티 버스로 이동했는데 걷기 시작하자마자 해발 400m의 별립산 아래 석모도를 마주한 강화 해안 둑방길에 세찬 비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이토록 악천후라도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1개 길 이상 완주한 지코(GKO)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정도 비는 끄떡없다.”, “태풍이 와도 걸으러 간다.”면서 강행군에 나섰다.
필자는 예전에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310.5㎞를 2.5회 완주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우의를 걸친 채 시속 5.1㎞ 속보로 걸을 수 있었는데 창후리에서 출발해 제방길 따라 망월돈대(望月墩臺)에서 잠깐 쉬면서 목적지 외포항까지 걸을 것인지를 잠깐 상의하였다. 비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고 있으니 일단 2/3 지점인 계룡돈대(鷄龍墩臺)까지 가서 진행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뉴카운티 버스를 계룡돈대로 오도록 연락을 취했다. 역시 바닷바람이 비와 함께 빗발치는데 빠른 걸음으로 해안 제방길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두 배로 힘이 들었지만 중간 기착지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고 강화도 내에 마련된 돈대(墩臺)는 총 53개라 하고 그 중 서해랑길 제102코스(=강화나들길 제16코스) 내에만 망월돈대, 계룡돈대, 삼암돈대, 망양돈대 등 4개의 돈대가 보존되고 있다. 결국 비바람이 너무 세차서 계룡돈대에서 걷기를 멈추고 만찬 장소로 이동하기로 의사결정이 되었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 비에 흠씬 젖은 채로 계룡돈대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경기도였기 때문에 경기도 기념물이었는데 인천광역시 지역에 편입된 후에는 인천(仁川)기념물 제22호가 된 계룡돈대는 다른 강화도 내 돈대들과 달리 축조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서 동료 회원들에게 간단하게 주지시켜 주었다.
계룡돈대는 길이 30m, 너비 20m 크기로 직사각형 모양이며 석축 하단에 ‘강화 18년 군위어영’이라는 축조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1679년(숙종 5년) 경상도 군위(軍威)의 어영군사들이 축조했음을 알 수 있는 돈대라는 점을 강조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계룡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광대돈대’로도 불린다. 둘레가 108m인 방형구조로 석벽 높이는 290㎝~670㎝이다. 동쪽 출입문 옆으로 명문(銘文)이 있다. ‘강희 18년 4월 일 경상도 군위어영(康熙十八年四月日 慶尙道 軍威御營)’이다. 강희 18년(1679) 4월 어느 날 경상도 군위현에서 온 어영청 소속의 군대라는 의미이다. 돈대 쌓은 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명문이다. 계룡돈대는 진보에 소속되지 않고 진무영에서 파견된 천총(千摠) 세 사람이 돌아가며 담당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돌에 음각으로 새겨진 한자(漢字) 명문을 해독하기 쉽지 않았지만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는 강화섬의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축조 명문이 있는 유일무이한 돈대라는 점에서 뜻 깊은 간이해설이 되었기에 나름 뿌듯했다.
유홍준 교수는 또 남도답사 1번지에서 “아는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라는 말도 남겼는데 우리가 문화유산 답사를 하건, 장거리 트레킹 코스를 따로 또 같이 걷게 될 경우에 무작정 앞만 보고 속도 위주로 걸을 것이 아니라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 탐방을 위해 가끔 샛길로 빠져 나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이 땅에 선조가 심어 놓은 학문과 역사와 지혜를 마음으로 새기고 몸으로 느끼며 걷는 도보 여행길을 꾸준하게 걸었으며 하는 바람을 피력해 본다. 인생도처유상수를 되내이며.
(62회 임순택)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