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62회 임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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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서울의 봄」을 시집간 딸 아이가 인터넷 예매해 줘서 오늘 오전 2회 상영분을 보고 왔다. 영화 내용이야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1979년 10월 26일 우리나라 5~9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된 이른바 10.26 사태 후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 등의 정치군인들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일으킨 군사쿠테타다.
당시 명목상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국무총리 등을 총칼로 겁박해서 정치 일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듬해 1980년 소위 정치 분야에서는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후임 대통령이 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야말로 18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박정희 1인 체제에서 벗어나 정치의 봄을 맞이할 것 같았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은행 본점 조사제2부 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1976년 12월 22일 논산 병력으로 경남 마산 월포초등학교 교정에 집합해서 입영열차 타고 논산훈련소 수용연대로 이동, 열흘 간의 장정 신분을 보낸 뒤에 그해 연말에 논산훈련소 30연대 12중대에 훈련병으로 입소하였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에 37일 간의 고된 훈련을 받고 자대배치 받은 곳이 의정부 제2보충대를 거쳐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포단(보병의 경우 연대)에서 다시 30포병대대 본부포대 이등병으로 전입되었다.
당시 육사 32기인 작전보좌관 李채언 중위로부터 포병숫자(1234567890 ; 하나둘삼넷오여섯칠팔아홉공) 테스트를 받고 전격적으로 작전과(S-3)로 보직이 결정되었는데 주특기는 하나삼삼(133 - 포병 사격지휘, FDC ; Fire Direction Center)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병, 일병 시절에는 소속만 작전과 요원이지 본부포대의 궂은 일은 모두 졸병들 몫이었다. 어쨌든 소정의 3년 가까운 세월(33개월 23일)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꿈에 그리던 국방부 전역 특명을 받고 입대동기들과 함께 대대장께 전역신고 후 군복을 벗고 고양시 예비사단 배출대에 와서 예비군복으로 환복하고 귀가했으며 몇일 쉬지도 않고 한국은행 인사부에 복직신고를 하자 군 입대 전과 같은 조사제2부로 발령이 나서 군인의 스포츠형 머리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는데 달포 뒤에 10.26 박정희 대통령 유고 사태가 발생했으며 갑자기 정국은 혼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드는 듯 했다. 10.26 사태 이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합수부단장을 맡았던 전두환 육군 소장(전진부대 1사단장)이 주도한 12.12 군사쿠테타가 일어나서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과 진배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만 1980년 서울의 봄을 구가하였지만 실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정치권력도 차지하려는 음모를 공공연히 드러냈고 이를 눈치 챈 대학생들과 민주 시민들은 군사정권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고 급기야 1980년 5월 17일 광주직할시(당시) 민주화항쟁 때 전두환 일당은 계엄령 선포 후 진압군을 대거 투입하여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는데 이는 영화 「택시 운전사」, 「화려한 휴가」에서도 잘 그려지고 있다.
1980년 5월에 필자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의 한국은행 본점 제5별관 조사부 5층에서 연일 격화되고 있는 민주화 항쟁 시위대와 바로 옆에 위치했던 서울시 경찰국에서 출동한 경찰병력의 최루탄 살포 등 서울시 전역이 시위현장으로 뒤덮혔다. 당시 한국은행 본점 조사제2부 물가조사과 행원으로 복직하여 근무하면서 재학 중이던 야간대학교 학우들이 태극기를 펼쳐 들고 시위하는 장면을 5층 창밖으로 애를 태우며 지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같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민주화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직장인에 더하여 청경야독하는 야간대학 학생 신분으로서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권력욕에 눈이 먼 전두환 등의 12.12 군사쿠테타에 이어서 영화 「서울의 봄」에서와 같이 이에 맞선 소수의 의로운 군인들이 희생되었고(그 또한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 대부분) 쿠테타를 주동한 전두환은 제11대 대통령에 취임(대통령 임기 또한 프랑스를 따라한다며 7년 단임, 12대까지 8년 가까이 집권)하였고 쿠테타에 동조한 수많은 영관급 이상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상당 기간동안 호의호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987년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전두환이 제5공화국의 수장이 되어 7년이란 세월이 흘러갈 때쯤 수면 아래에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투쟁이 다시 불 타올랐는데 결국 호헌(헌법수호)을 부르짖던 전두환과 쿠테타의 단짝 노태우(백마부대 9사단장)는 그해 6.29 선언하고 개헌과 더불어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함으로써 7년 만에 다시 ‘서울의 봄‘이 다가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6공화국의 수장으로 저조한 30퍼센트 대 득표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때 전두환의 육사11기 동기이자 적극적으로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서울로 투입시켰던 장본인이 이어서 대통령에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인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5공 때 전두환의 임기는 단임이 되, 프랑스식의 7년이었는데 노태우의 6.29 선언 후 개헌에서는 단임 5년으로 바뀌어서 20대 대통령인 현재까지 지켜오고 있는 대통령제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현대 민주주의가 이만큼 수준에 도달한 것은 전적으로 40여 년 전 혹은 그 이전부터 도도히 이어온 민초들의 민주화 항쟁 덕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군 내부에서 쿠테타 세력과 반쿠테타 세력간의 무력 충돌이 주로 등장하였지만 한 나라의 나아갈 길을 결정한 것은 언제나 민중들의 힘이 뒷받침되었을 때다. 총칼의 힘으로 즉,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1980년 서울의 봄 속 정치군인들의 말로는 법으로 재단되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내란의 죄로 감옥에 갇혀 치죄되었지만 또 다른 정치 논리로 후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어 풀려 났다가 결국은 대국민 사과 없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짧지 않은 44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영화 「서울의 봄」을 본 소감은 2시간 내내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불편하다는 생각으로 일관되었다. 그 때 그 시절에 중앙은행 직원이자 야간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때인지라 민주시민으로서 무엇이라도 했어야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었고 44년 지난 지금 노년이 되어서 되돌아 보는 그 때 정치군인들의 행태를 볼 때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권력욕은 그 끝이 어디인가? 라는 생각들이 반복적으로 되돌이표로 계속해 왕복하게 된다.
우리 세대는 실제 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십분 이해하고 분개하지만 훨씬 뒷 세대는 수능 등 시험과목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영화를 관람하도록 하여 부모님 세대 때의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등을 제대로 알고 학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민주화된 사회가 그냥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획득한, 쟁취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기실 1980년 5월 17일 전후해서 한국은행 본점 조사제2부 과(課) 사무실에는 광주상고(현 광주동성고) 출신의 동료직원이 있었는데 광주 본가에 계신 부모님과 전화 통화도 되지 않는다며 안절부절하던 당시 직원의 사색이 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1980년 5월에 무등산이 감싸고 있는 빛고을 광주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고립의 도시였었다. 공수부대가 진압군으로 전격 투입되어 국군이 자국민을 대량학살하였으니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 저지른 쿠테타 주도세력의 원죄는 씻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죄악이었다. 필자는 대학원 경영학석사 자격으로 광주은행 책임자 공채에 합격한 뒤 1990년 1월에 광주로 이사하여 광은리스금융 설립사무국에서 근무하였는데 광주시 동구 금남로 5가 광주은행 본점 5층에서 매년 5월이 되면 5.18 민주화항쟁 기념 시위가 열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서 금남로 일대 가족 식사하다가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며 자리를 피했던 일도 매년 일어나는 연례행사가 되었고 또 5월이 지나면 짙고 푸르른 빛고을 광주의 진산(鎭山) 무등산 서석대에 오르거나 매주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토끼등 약수터에 들러 수량 풍부하고 물맛 좋은 약숫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 광주 무등산의 실질적인 정상인 瑞石臺(해발 1,100미터) 수정 병풍바위 위에 서서 빛고을 광주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수십 년 전의 아픈 상처를 딛고 성장하고 있는 광주를 보게 된다.
개봉 영화 「서울의 봄」을 혼자 관람하고 난 뒤의 소회는 한 마디로 복잡다단하다.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었고 한민족 개개인의 능력이 원캉 뛰어나 각 분야에서 세계 으뜸가는 우리나라는 정치 분야만 잘하면 머지 않은 때에 세계 최고의 선도국가에 올라 설 수 있으리라 보며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알차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도록 하자. 무슨 일을 하건 남 핑계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올곧고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을 다듬어 나가며 필자와 같이 매일 하루에 만보(7.1㎞)이상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볼 것을 권유드린다. 필자의 매일 걷기 목표는 누적일수 3,000일에 30,000㎞인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를 실천한 결과 금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연속 2,000일을 달성하게 된다. 우리 모두 건행!
임순택 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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