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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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암(56회,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미추홀(彌趨忽)구
삼국사기에 명명된 미추홀은 인천의 옛 이름이면서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다.
미추홀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견해는 물의 고장이란 뜻이다. 비류가 도읍한 문학산 일대가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물골이었다는 뜻이다.
다음 미추홀 해석으로 거친 고장으로 보는 견해다.
고구려가 인천을 점령했을 때 매소홀로 부른 것에서 유래를 풀어보는 방식이다. 매소홀의 매는 거칠다는 뜻으로 소를 사이로 보면 거친 고장이 되는데 비류가 이곳을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 없었다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미추홀을 해석하면 뿌리의 고장이라는 말로 바탕골이 된다는 견해다. 미추를‘밑’이라는 뜻으로 미추홀은 근원이요 바탕이 되는 곳, 즉 도읍이 되는 곳이라고 뜻을 풀어볼 수 있다. 미추홀이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북부여왕 해루부의 서손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 한동안 졸본에서 살다가 부여에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과 재혼하였고, 고구려에서 창업을 위하여 많은 외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여 씨의 소생 유리가 고구려 태자로 책봉됨에 왕위계승권을 잃어버린 비류와 온조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남하해서 미추홀에 정착할 때,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데리고 동행하였다.
하지만 미추홀의 땅은 습기가 많고 물이 너무 짜서 편히 살기 힘들었다. 비류는 다시 온조가 도읍한 하남위례성으로 갔다. 후세 사람들은 비류가 온조가 도읍한 하남위례성으로 갈 때 넘어갔던 길인 남동구 만수동 성현 마을 동쪽 산등성을 비류 고개라고 불렀다.
비류는 하남위례성으로 가서 보니 온조와 백성들이 편히 살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을 알고 부끄럽게 여겨 죽고 말았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 모두 온조가 도읍한 하남위례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과 힘을 합쳐서 건국한 나라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 중간에 있는 구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청사가 자리 잡으면서 인천의 중심이 되었다.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된 다음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혁을 거쳤고, 1960년 이후 인천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성장하여 여러 교육기관과 병원이 들어섰다.
서남부는 바다는 1960년대부터 간척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숭의2동에 미추홀구청, 용현5동에 옹진군 군청, 프로야구 SSG랜더스 필드, 프로축구 숭의 구장이 있다. 4개의 도시철도 노선이 지나고, 남쪽으로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지난다. 2018년 7월 1일부터 백제시대의 지명을 따서 미추홀구로 바꿨다.
필자는 인천광역시가 세계의 문화관광 도시, 국제 금융 도시, 국제무역의 중심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중심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더불어서 미추홀구가 인천광역시의 중심구로 우뚝 서기를 고대하면서 미추홀의 뜻과 미추홀구에 대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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