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인들은 종교를 믿어도 달라지지 않는가?
본문
한국인들의 신심은 남 다르다.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 시대를 아우르는 종교가 없었던 때가 없었다. 고운 최치원이 말했듯, 삼국 시대와 그 전에는 '풍류도'라는 것이 있었다. 풍류도는 동북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일종의 민간신앙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 이른다. 이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備祥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최치원: <난랑비서(鸞郞碑序)>)
삼국을 통일한 신라 시대와 그 이후 이어진 고려 시대는 고등 종교 불교가 꽃을 피웠다. 신라는 원효와 의상과 같은 선사들을 배출했고, 고려 시대에도 의천과 지눌과 같은 수많은 선사들을 배출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고려인들은 부처님의 가피로 외적을 물리치겠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현실 문제를 종교로 풀려 했던 것은 어리석어 보일 지 몰라도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문화사에 남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창건할 때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을 새로운 시대의 통치 이념으로 정립했다. 조선은 '철학의 나라'라고 할 만큼. 성리학은 일반 백성들의 삶에서 시작해 정부의 일을 맡는 관료들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도 적용됐다.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은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기 시작할 때 부터 서당에서 하늘 천 따지의 천자문을 배우고, 그것을 마치면 소학과 명심 보감을 배우고, 좀 더 커서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4서 3경을 공부했다.
근대에 이르러 서구의 기독교가 유입되는 것을 조선은 여러가지 형태로 막았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면서 미국의 선교사를 통해 급격하게 기독교가 유입되고, 망국의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기독교에 의탁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 길선주의 고백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대 부흥은 기독교의 급격한 확산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로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글 성경을 통해 조선인들의 문맹을 깨우치고, 미국 식 교육 제도의 도입을 통해 합리적 사고와 개인주의 사상을 정착시키는 데도 역할을 했다. 식민지 시대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북한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이념의 지배를 받고, 남한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독교는 조선의 오랜 유교 전통을 하루 아침에 뒤집고 친미주의와 함께 한국인들의 의식을 사로 잡았다. 서구에서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던 기독교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한국에서 크게 번창한 것이다.
종교인 비율(2022년)
2022년 통계에 의하면 2022년 한국인들의 종교 인구 비율은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 종교 없음 51%라고 한다. 적어도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와 불교를 위시한 여러 종교를 믿고 있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종교 지향성 비율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종교인들의 비중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종교들이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급 종교는 무엇보다 현세의 부를 추구하는 기복 신앙과 다르다. 만일 종교가 인간의 탐욕이나 원시적 본능을 부추긴다면 그런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주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세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대 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고, 어떻게 돈을 버느냐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천민 사상, 배금주의 사상은 종교가 추구하는 정신과 상치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떻게 종교인의 비율이 국민의 절반이나 되면서 돈이 국민 대다수의 지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오래 전 '돈 많이 버세요.'라는 광고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인기 가수인 김 정은이 나와서 하던 광고인데, 돈 많이 벌라는 것이 티브에서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다.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것은 '화폐 신'(money god)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그런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탐욕을 부추기는 마약이거나 기껏해야 사교를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여의도의 모 대형 교회는 3박자 복음을 통해 기복을 강조했고,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는 배타적인 신도 공동체 역할도 한다. 그것은 불교나 다른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대선 때 등장한 거리의 전 모씨 부류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인들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추악한 면모를 부끄러움 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교회의 십자가가 높아가고, 사찰이 불사를 화려하게 해도 한국사회의 발전과 한국인들의 의식 변화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직 종교로 위장된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종교가 주는 깨달음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는 현세의 삶에 우리가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우리가 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꿈과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으니, 마땅히 이런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에 우리가 목숨걸고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도서 1장은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11]) 모든 것이 헛된 이런 현실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헛된 일일 뿐이다. "나 이외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 조차 사실은 절대자에 비추어 볼 때 하찮고 하루살이 같은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상대의 세계를 넘어 절대의 세계를 밝히는 태도는 거의 모든 고급 종교에 일관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종교의 정신에 투철한다면 현세의 이해관계 때문에 싸울 필요도 없고, 또 이 현세의 것들에 애착을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종교가 그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다면 대부분의 종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터'(홉스)라고 할 이 현세에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일깨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종교가 과연 그런 의미를 띠고 있을까?
한국인들은 유독 현세와 그 현세의 재물과 권력에 집착이 강한 민족이다. 대부분 말로는 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세를 이야기하고 내세의 심판에 대해 아무리 강조를 해도 코웃음도 치지 않는다. 내세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현세의 삶을 바르게 살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 할텐데 이른바 한국의 종교인들에게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모래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것보다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인들이 종교를 믿는다 해도 그들의 믿음이 한국사회의 긍정적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그들의 믿음이 종교적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 종교인들을 보면 종교라는 아편에 도취된 모습이 더 잘 연상이 될 뿐이다. 한국의 종교인들이여! 부끄럽지 않은가? (이 글이 일반화의 오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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