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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한국인 (63회,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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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2024-01-30 19:51 63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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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나이 열 다섯에 공부에 뜻을 두었고(志學), 서른 살에 내 생각이 섰고(而立), 마흔 살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不惑), 쉰 살이 되면서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知天命), 예순 살에는 남의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耳順), 일흔 살에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從心).”


하지만 공자의 이런 말을 우리 시대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공자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자의 경우라면 몰라도 우리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1. 志學: 공자는 나이 15살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이제 배우고 익히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배움에 대한 공자의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아주 유명한 말이다. 논어에는 유난히 배움에 대한 말들이 많다. 그만큼 공자는 무언가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배우는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공자의 호학정신(好學精神), 배움에 대한 개방성이야말로 2천 수백 년이 흘러서도 여전히 공자의 말씀이 현재화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런 배움에 큰 뜻을 세운 공자의 나이가 15살이다. 과연 우리 시대에 이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15살이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나이일 것이다. 한국에서 이 나이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 공부에 매진하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런 공부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선생에 의해서 끊임없이 주입되는 공부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장 등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이다. 좋아서 하는 공부도 쉽지 않은데, 이처럼 강제된 공부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학생은 극소수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란 가장 재미가 없고 하기 싫은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돼지우리 같은 학교와 학원에 가둬놓고 사육하니 학교폭력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2. 而立: 공자는 15에 공부를 시작해서 30에 뜻이 섰다고 했다. 여기서 섰다(立)는 말은 오랜 배움을 거쳐 비로소 자기 생각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는 일단 기존의 축적된 지식, 이론과 사상들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수동적으로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의 생각이 샘솟듯 분출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생기고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가타부타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자가 立이라고 할 때는 나이 30에 그런 경지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어떨까?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사회화의 과정에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초등학교 6년+중고등학교 6년+대학 4년을 정상적으로 밟으면 무려 16년을 학교에서 지내야 한다. 중간에 재수를 한다든지 남자들의 경우 재학 중 군대 2년을 다녀오면 거진 20년 가까이 걸린다. 요즘은 재학 중에 1-2년 정도 해외 연수를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학교 문턱을 졸업하는 셈이다. 계속 공부할 경우 석사 정도를 마치는 시간이 30 정도가 된다. 하지만 석사 정도의 수준에서 자기 생각을 펼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박사를 마치고서도 몇 년간의 연구나 현장 경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자기 생각을 세울 수가 없다. 때문에 而立은 30 중반을 훨씬 넘겨서 40 정도에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3. 不惑: 일단 공부에서 자기 생각을 세우게 된 공자는 이제 좁은 배움의 과정을 넘어서 자신의 삶과 세상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을 대략 10년 정도 거친 후에 공자는 不惑이란 말을 사용한다. 불혹이란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不惑은 개인의 생각과 삶의 실천에서 두루 통하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할 때 흔들림이 없다거나 어떤 유혹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 40이면 기업으로 치면 부장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때쯤에는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세력과 위에서 내리 누르는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러므로 나이 40은 가장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공자처럼 나이 40에 불혹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개인사와 관련해서도 40쯤이면 결혼 후 대략 10년 정도 될 때다. 이쯤 되면 부부 관계에서도 변화가 많이 일어난다. 10년 세월을 함께 한 부부 사이에 긴장이나 사랑이 사라지고 그저 습관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 가정 내의 남자와 여자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시간에서도 여유가 있다. 서로 상대만 바라보던 눈이 비로소 다른 상대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주 객관적인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셈이다. 유혹은 바로 이런 순간에 다가온다. 그러므로 나이 40은 불혹이 아니라 유혹의 시간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4. 知天命: 『중용』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하늘이 내린 것을 성이라고 하고(天命之謂性), 그것을 따르는 일을 도라 하고(率性之謂道), 그 도를 닦는 일을 교라 한다(修道之謂敎)”.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갈고 닦는 일을 도(道)라 한 것이다. 공자가 지천명이라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동서고금을 털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문이다. 그런데 공자는 나이 50에 비로소 인간을 이해했다고 한 것이다. 공자의 이런 말씀을 50 먹은 현대인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는 공자가 이해했던 당시보다 훨씬 어려워졌을지 모른다. 공자의 시대는 현대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해서 인간의 타고난 성정을 파악하기도 어렵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현대에는 인간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블랙박스다. 인간에 대해 고려해야 할 점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지천명은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오는데, 자신을 되돌아볼 겨를과 여유가 없는 한국의 50대에게 공자가 말씀하신 지천명은 요원한 문제일 것이다.


 


5. 耳順: 이순이 무엇일까? 귀는 외부의 음성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이다. 눈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입은 내부의 정보를 외부로 배출하는 기관이다. 문자로 이루어진 시각 정보는 비교적 안정되고 보편성을 띠고 있지만, 소리로 이루어진 음성 정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면이 더 많다. 공자가 이순이라고 했을 때는 이처럼 불안하고 거친 음성 정보가 어떤 형태로 들어오든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60을 먹은 현대인에게 이런 이순이 가능할까?


‘억울함’은 한국인들이 특히 많이 겪는 보편적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인들은 소송에서 이겨도 억울하고 져도 억울하다. 다들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대한민국이 단군 이래 가장 번성한 국가가 되었을지 몰라도 한국인들은 OECD 국가군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이런 억울함은 주관적 인식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외부 현실이 어떤 경우이든 한국인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길까?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누적된 피해의식, 수탈과 희생감이 커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벗어던질 상황이 돼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객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내부에서 소화를 할만한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태도 조정이 안 된다는 의미다. 스토아의 현인들은 세상은 바꿀 수 없어도 세상에 대한 나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apatheia)를 구할 수 있었다. 공자가 이순(耳順)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반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외부의 모든 것이 걸리는 역순(逆順)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6. 從心: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라는 말이 있다. 평균 수명이 짧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100세 세대를 바라보는 오늘날 인생은 70부터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생물학적 나이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공자가 70이라고 한 것은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선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도 이런 욕구를 벗어난다는 것은 성인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법도나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주관적 욕구와 객관적 현실 간에 완벽한 일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욕구에는 생물학적 성욕, 경제적인 물욕, 정치적인 명예욕, 학문적인 지식욕 등 다양하게 있다. 그중의 하나가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도 포함될 수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人不知而不溫)는 공자의 말씀은 이런 인정의 욕구도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식솔과 제자들을 이끌고 유랑할 때 수도 없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서러움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공자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조차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성인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도 허물이 없다. 과연 한국의 70대에서 이런 경지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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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전 연세대학교 교수, 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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