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의 밤 / 정항암. 56회
본문
열네 살 이금용은 어머니 김복자의 전송을 받으면서 신작로를 따라 목포역으로 향했다. 목포역에 도착한 다음 오후 다섯 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디를 가는 사람들인지 입석을 가득 메웠다. 오전 여섯 시경, 손에 옷 보따리를 들고 영등포역 플랫폼에 내렸다.
겨울이 문턱에 다가와서 그런지 스산하고 쌀쌀한 날씨는 자라처럼 모가지를 움츠러들게 했다. 너덜너덜한 벙거지, 검정 고무신, 물감이 퇴색한 검정 옷은 누가 보아도 촌놈 티가 흘렀다. 금용은 출구를 향해서 걸었다. 역무원에게 차표를 주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어디로 갈지를 망설였다. 50미터 왼쪽에 있는 골목으로 걸어갔다.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맞는 골목길 양쪽에 일본식 다다미 집과 허술한 쪽방이 줄지어 들어섰다. 통풍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녀와 포주가 지나다니는 남성을 가로막고 호객행위를 하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1959년 9월 하순, 오전 일곱 시경이면 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 때여서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잠을 청하기에는 어정쩡했다.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어머니가 배가 고프면 빵이라도 사서 먹으라고 주머니에 넣어준 돈과 팬티 주머니에 넣어준 비상금을 쓰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직장에 출근하거나 볼일이 있어서 거리를 오가는 일이 빈번할 때까지 영등포역 근처 사창가 골목을 돌아다녔다. 골목을 지나 다시 한길로 나왔을 때는 오전 여덟 시가 넘었다. 영등포역 앞 광장 모퉁이에서 풀빵을 굽는 포장마차를 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풀빵이 얼마예요.”
“응, 다섯 개에 천 환이란다.”
“네, 따뜻한 걸로 10환어치만 주세요.”
이금용은 풀빵 다섯 개를 게눈감추듯이 먹었다. 어제 아침 일찍이 집에서 밥 몇 숟갈을 떠먹었다. 그 후 24시간이 지나도록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를 않았다. 돌멩이도 씹어먹으면 소화될 나이에 풀빵 다섯 개가 아닌 열 개를 먹어도 배가 배부르지 않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아저씨가 두어 개를 더 줄 테니까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라.”
“아저씨 감사합니다. 제가 시골에서 방금 올라왔는데요. 자리를 잡고 돈을 벌면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준 음식이다.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오너라. 풀빵이라도 구워서 주마.”
그 아이는 풀빵 굽는 아저씨가 덤으로 준 빵도 모두 먹었다. 따뜻한 풀빵으로 요기하자 배고프고 스산한 날씨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몸은 온기가 돌았다. 일할 자리를 알아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영등포역 골목길 모퉁이에 역전 여관이 자리했다. 필승권투장과 세탁소가 나란히 자리했다.
“주인아주머니 계셔요.”
“내가 주인인데 무슨 일이지.”
“안녕하세요. 저는 시골에서 올라온 이금용이라고 합니다. 혹시 여관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필요하시면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하고요.”
“지금 몇 살이지,”
“네, 열네 살입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서 훨씬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모양인데 빈방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인 다음 낮 손님이 들기 전에 방 청소를 깨끗이 해라. 알아둘 것은 숙식은 무료로 제공한 대신 월급은 없다. 네가 손님에게 심부름을 해주고 용돈을 얻어쓰는 것으로 만족해라. 오늘은 처음이니까.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마.”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주변에서 제법 규모가 큰 역전 여관 주인아주머니에게 사정을 구해서 심부름하는 아이로 취직한 일은 갈 곳 없는 금용이에게 감지덕지했다. 당장 먹고 자는 일을 해결한 만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살펴보면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다른 직장을 구하거나 야간 중학교라도 다니려고 결심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방으로 안내하고 대실료를 받은 다음 물 주전자와 수건을 가져다드려라. 남자 손님이 아가씨를 부탁하면 잠깐 쉬어가는데 천 환, 긴 밤을 자는데 3천 환 받아라. 손님이나 아가씨가 팁을 주면 그 돈은 너의 몫이다.”
금용은 주인아주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여관 내부구조를 익혔다. 창녀를 부르는 남자 손님이 있으면 아가씨를 불러다 주고 가게에서 담배나 술을 사서 가져다주는 잔심부름하는 방법을 배웠다. 샤워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은 다음 빈방에서 휴식을 취하느라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 조용한 방이 있어요.”
“어서 오세요. 쉬었다 가시려고요.”
“네, 요금이 얼마인가요,”
“5백 환입니다.”
“아가씨를 부르는데 얼마지요.”
“긴 밤은 3천 환인데요. 낮에 잠시 쉬어가는 것은 천 환입니다.”
“알았습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꼬마에게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용아, 손님을 2층 210호 실로 모시거라. 수건하고 물 주전자를 가져다드리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심부름해라.”
“네, 사장님.”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서 남자 손님이 여관에 들어왔다. 금용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남자 손님을 2층 210호실로 안내했다. 대실료 5백 환을 받아서 주인아주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물이 담긴 주전자와 세수나 샤워하고 몸에서 물기를 닦을 수건을 가져다가 남자 손님 방에 들여놓았다.
“꼬마야,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를 불러와.”
“네, 손님.”
남자 손님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찾는 벨을 눌렀다. 서둘러서 210호실로 올라갔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남자 손님이 아가씨를 부른다는 말을 전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밖으로 나가더니 나이가 어리고 귀엽게 생긴 여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 손님에게 천 환을 받아서 몸판 여자와 5백 한씩 나누었다.
“예, 꼬마야. 나는 골목길 쪽방에 있는 하순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백 환은 네 몫이니까. 받아라.„
‟감사합니다. 누나.”
금용은 여관에 취직한 첫날부터 창녀에게 백 환을 팁으로 받았다. 남자 손님은 가게에서 담배와 술 심부름 수고비로 백 환을 주었다. 어느새 거금 2백 환을 벌어서 횡재했다. 금용은 여관에 일하면서 월급을 받지 않아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1960년 3월 초순, 이금용은 영등포역 앞 사창가 골목 코너에 있는 역전 여관에 취직하고 6개월이 지났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열다섯 살이 되었다. 고향에서 가난한 형편에 배를 곯고 살 때보다 쌀밥과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부쩍 키가 크고 코 밑에 솜털이 났다.
불두덩에 검은 잔털이 돋았다. 고추가 예전보다 커지고 성을 내면 몽둥이처럼 빳빳하게 뻗쳤다. 키가 커지고 체중이 느는 등 신체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어린이가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달리진 신체적 변화가 부끄러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몸조심하기에 급급했다.
금용은 여관에서 일하며 창녀들과 남자 손님들로부터 받은 팁이 일반 월급쟁이보다 많아서 수입이 짭짤했다. 심부름하고 팁으로 받은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한길 건너 은행에 저금했다. 불과 6개월이 지나는 동안 몇만 원이나 되는 돈을 저축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아저씨,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사실은 제가 여관에서 일해도 장래를 생각하면 항상 불안해요. 주인아주머니에게 사정을 구하고 한가한 낮에 중고등학교 검정고시학원에 다녀서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받는 국가 검정고시를 볼 예정입니다. 아저씨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세탁 기술을 배우고, 필승권투장에서 권투도 배우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철이 빨리 들었구나. 나도 너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고등학교 과정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자수성가로 장만한 건물에 세탁소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 아무 때라도 좋으니 시간 나면 차근차근 배워라. 독학으로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 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을 얻으려는 생각을 찬성한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나중에 일을 세탁 일을 배우러 오겠습니다.”
이금용은 비록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뭇 남성에게 몸을 파는 창녀와 공생 공존하는 처지지만 정신만큼은 건전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금용아, 고생되어도 항상 바른길을 가려고 생각해라. 선한 뒤끝은 있어도 악한 뒤끝은 없는 법이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마라. “ 는 가르침이었다.
1946년 3월 초순, 이금용은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경수는 금용이가 돌이 갓 넘었을 때 상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청상과부가 된 홀어머니 김복자는 어린 아들 금용이와 살아가면서 보릿고개를 넘기는 일이 8부 능선을 넘는 것보다 힘들었다.
1953년 4월 초순, 금용은 6.25 한국전쟁이 3년째 접어든 해에 여덟 살이어서 국민 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6년이 지난 1959년 3월 중순, 열네 살에 국민 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 김복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경수가 남긴 전답 몇 마지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살림을 꾸렸다.
금용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다음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벗어나는 데 도움 되지 않았다. 고향에서 가난을 면치 못하고 고생할 거라면 먼저 서울로 올라간 고향 형들이 주경야독으로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처럼 공부해서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 고향 형들처럼 서울로 올라가서 주경야독이라도 하겠습니다.”
“금용아, 열네 살이면 어린이여서 철도 들지 않았다. 그런 네가 서울로 올라가서 무엇을 하겠단 말이냐.”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려면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어미 마음은 어디 그러냐.”
“어차피 집안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바에는 서울로 올라가서 성공한 다음 돌아올게요.”
“그렇다면 너의 뜻대로 해봐라. 네가 떠나는 날 어미가, 김밥을 말아서 줄 테니 배고프면 먹어라. 주머니에 넣어준 돈은 배고플 때 풀빵이라도 사서 요기해라. 팬티에 주머니를 달아서 넣어준 2천 환은 비상금이니 도저히 살길이 보이지 않으면 여비를 해서 집으로 돌아오너라. 너의 아버지만 살아계셔도 지금보다는 형편이 나으련만 하늘이 야속하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금용이와 어머니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으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금용은 서울로 올라와서 영등포역 앞 골목 코너에 있는 역전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는 동안 세상은 변화무쌍했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 학생혁명은 전국으로 번졌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냈다. 4월 27일, 집권 여당의 실세 이기붕 가족들이 자살했다. 허정 임시내각에 이어서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어도 국민이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조속히 해결하고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 등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1962년 6월 10일, 국민에게 저장된 자금을 경제개발에 활용하려고 10환을 1원으로 평가 절상한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섰다. 1963년 12월 17일, 그는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금용은 영등포역 앞 골목 코너에 있는 역전 여관 종업원이 되어서 3년이 지나는 동안 열일곱 살,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어머니 김복자와 약속한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깡패와 불량배를 비롯한 창녀가 득실거리는 사창가에서 살아가려면 강인한 힘이 필요했다. 불량배가 넘보지 못하게 하려고 필승권투장에 드나들면서 권투를 배워 힘과 실력을 겸비했다. 세탁소에서 세탁과 재봉틀 기술을 연마해서 어디를 내놓아도 빠지지 않은 청년이 되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그간 안녕하시지요. 저는 어머니와 약속한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한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세탁소 기술도 배우고, 체력을 연마해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머지않은 시간에 어머니를 모시고 편히 모시겠습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 김복자가 보고 싶어서 그리워했다. 내년 봄에 대학교에 입학해서 낮에는 대학교에 다니고 손님이 많은 오후와 저녁 시간에 여관에서 일할 예정이었다. 1964년 12월 중순, 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해서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합격 했다.
“이군, 성균관 대학교 합격을 축하해.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여관 일이 힘에 부치네. 자네하고 동갑인 내 딸 옥순이하고 의논해서 여관 운영을 맡아주면 고맙겠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금용이, 축하하네. 어리게 보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의젓한 청년이 되어서 대학생이 되다니, 참으로 대단해.”
“세탁소 아저씨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역전 여관 주인아주머니를 비롯한 세탁소 아저씨, 영등포역 앞 뒷골목에서 동고동락한 창녀와 풀빵 장사 아저씨를 비롯한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축하했다. 이금용은 열네 살 꼬마가 5년 전 옷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떠나 영등포역에 내려서 정착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지나갔다.
이금용은 한가한 시간에 영등포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는 6.25 한국전쟁을 주제로 하는 돌아오지 않은 해병이었다. 주연은 장동휘, 황해, 구봉서, 이대엽, 전영선 등 다섯 사람이었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서 본 여자가 앞을 지나갔다.
“잠깐, 혹시 고비선이 아닌가요.”
“맞는데요. 누구신가요.”
“나야. 국민 학교 동창 금용이야.”
“응, 금용이가 웬일이냐.”
“그렇게 됐다. 점심밥 먹지 않았지. 우리 어디서 자장면이라도 먹자. 그리고 다방에서 커피도 마시자.”
그는 국민 학교 동창 고비선을 데리고 근처 중화요리 집에 식사하러 들어갔다. 그녀가 어떻게 천리타향 영등포에 왔는지 몰라서 호기심도 발동했다. 일단 자장면을 주문한 다음 맛있게 먹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근처 극장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여서 그런지 상큼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래, 어떻게 영등포에 올라왔냐.”
“응, 나는 가족들이 많아서 오빠, 남동생 셋, 그리고 나 이렇게 5남매가 아니냐. 동생들을 가르치려면 내가 식모살이라도 해야만 될 것 같아서 서울로 올라왔지. 영등포 동방 방직공장 기숙사에 살면서 직공으로 일하고 있지.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올라왔으니까. 벌써 7년이나 되었네. 너는 어떻게 된 거냐.”
“나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진학 포기했지. 서울로 무작정 올라온 거야. 영등포역 앞 골목 코너에 있는 역전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해. 주인아주머니와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고등학교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1학년에 입학했지.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여관 일을 하면서 살지.”
“너는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잘되었구나. 나는 검정고시학원에 다녀서 겨우, 중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더 이상 배우지를 못했지. 하지만 남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고등학교 자격을 인정하는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대학교에 같이 다니자. 가능하면 중고등학교 선생님도 되고 말이야.”
“아니야, 방직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 공부하기 어려워.”
“사실은 그동안 돈을 많이 모아두었지. 고향에 내려가서 전답을 장만하면 중부자 말을 들을 정도야. 내가 2년 후 대학교 3학년이 되면 군에 입대할 예정이니까, 그동안 영등포역 근처에 쪽방을 얻어 전세로 살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나처럼 고등학교 졸업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교에 다니면 돼. 내가 여관에서 일하다가 자주 오면 되잖아.”
“나도 너만큼은 돈을 모으지 못했지마는 어느 정도 비상금을 가지고 있어. 우리 나이가 스무 살이면 결혼할 나이지. 금용이 네 말을 알아들었으니까. 우선 전세방이라도 얻어놓은 다음, 실타래처럼 얽힌 일을 하나씩 풀어보자.”
금용은 고비선이 가족들을 위해서 방직공장에 다니며 희생하는 살신성인의 정신에 감탄했다. 그녀에게 전세방이라도 얻어주어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같이 다니기를 바랐다.
1967년 3월 초순이었다. 이금용은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이 되었다. 고비선은 국민 학교 동창 이금용의 도움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성균관대학교 가정학과에 다니는 당당한 대학생이 되었다.
“비선아,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해.”
“고마워. 모두가 네 덕이야.”
“아니야. 네가 고생한 보람이지. 그건 그렇고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다름이 아니고 다음 주인 3월 하순, 군에 입영 영장이 나왔다. 이틀 후 논산훈련소 입소야.”
“왜 군대에 간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어.”
“아니야, 네가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지 몰라서야. 아무튼 학교에 다니면서 잘살고 있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나는 행정 병과여서 인사업무나 다른 보급 행정업무를 보겠지. 월남전 파병을 지원한 다음 제대하고 돌아올게.”
“알았어. 그동안 고마워. 잘 다녀와.”
금용은 제대할 때까지 고비선이 생활에 지장 없도록 하려고 저금통장에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서 생활비로 건네주었다. 그는 역전 여관으로 돌아온 다음 주변에서 동고동락했던 세탁소 아저씨, 몸을 파는 창녀를 비롯한 필승체육관 관장과 같이 운동했던 선후배들에게 군에 나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주인아주머니, 그동안 감사합니다. 다음 주 군대에 가게 되어서 논산훈련소에 입소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옥순씨하고 잘 지내세요.”
“이것이 무슨 말이야. 진작 말하지 않고 이제 말을 하는 거야.”
“제가 개인적으로 일이 있어서 해결하려고 돌아다니느라 바빴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해. 친자식이나 다름없는데 무슨 말인들 다 들어줄게.”
“저하고 국민 학교 동창 고비선이라는 처녀가 방직공장을 다니다가 고등학교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성균관대학교 가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 근처에 사니까 데리고 와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돌봐주시면 제가 제대한 다음 보상하겠습니다.”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듣지 않겠냐, 염려 마라. 고비선 처녀가 사는 집을 자주 들려서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줄게. 금용이가 쓰던 방은 그대로 둘 테니까, 휴가를 나오거나 제대하면 집에 와서 지내도록 해.”
“감사합니다. 제가 지원해서 월남전 파병을 가려고 하는데요. 매달 월급을 보낼 때 아주머니 앞으로 보내겠습니다. 모아두어다가 제대한 다음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골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넉넉한 전답과 염전을 사드릴 예정입니다. 옥순 씨도 잘 지내요. 서로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요.”
“금용씨도 제대 후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요. 그때까지 기다리겠어요. 혹시 누가 알아요. 제 낭군이 될지요. 호, 호, 호…”
금용은 영등포역 앞 역전 여관에서 살아온 세월이 어언 7년이 지나 스물두 살이 되었다. 세탁소 기술을 배우고, 필승권투장에 다녀 노련한 권투선수가 되었다. 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이 되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이금용은 성균관 대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논산훈련소에 입소 했다. 3개월 동안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보충 교육대에서 3주 동안 교육받은 다음 1군사령부 인사과에 근무했다. 맹호부대 일원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다. 1970년 6월 하순, 귀국한 다음 군에서 제대하고 영등포역 옆 사창가에 있는 역전여관으로 돌아왔다.
“아주머니 그간 안녕하셨어요. 옥순씨도 안녕하세요.”
“덕분에요. 금용씨 군대에서 제대한 것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아주머니와 옥순씨 염려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 그런데 금용이에게 할 말이 있네.”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 국민 학교 동창 이야기인데 시골에서 아버지하고 오빠가 올라와서 다 큰 처녀가 무슨 공부를 하나면서 시집가야 한다고 강제로 데리고 내려갔지. 아무리 말려도 도대체 말을 들어야지. 그 후 소식을 듣지 못했어.”
“그렇군요. 할 수 없지요. 인연이 거기까지니까요.”
“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3개월 전 제대할 예정이었는데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간첩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하려고 남파된 바람에 3개월 연장되어서 3개월 더 근무했지요. 일단 고향에 내려가서 제가 아주머니에게 보내드린 돈과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돈으로 어머니가 편히 살 수 있도록 전답하고 염전을 사드리고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그리고 내년 봄에 성균관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할 예정입니다. 바라던 행정고시도 응시하고요”
“그렇게 하게. 자네가 쓰던 방이 그대로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게. 옥순아, 앞으로는 금용씨가 복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행정고시 준비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뒷바라지해라. ”
“엄마, 걱정하지 마요. 제가 금용씨가 보고 싶어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는데요.”
“옥순씨 고마워요. 그런데 옥순씨는 지금 무엇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빠른 시간에 교편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도 정리하려고요. 카바레와 영등포 시장이 자리한 번화가에 호텔을 지어서 운영할 예정입니다. 그때도 금용씨가 도와주실 거지요.”
“그럼요. ”
금용은 역전 여관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방에 여장을 풀었다. 국민 학교 동창 고비선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어서 그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다 못해 만지기도 아까워서 손목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아버지와 큰오빠를 따라가서 누구하고 결혼한 다음 자식을 낳으면서 살던지, 어디서 살던지를 불문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 바랐다. 금용은 마음속으로만 아끼고 사랑하다가 이루지 못한 국민 학교 동창 고비선과 인연이 짝사랑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금용은 고향인 땅끝마을 해남으로 내려갔다. 월남전 파병으로 받은 월급과 예전에 저축했던 비상금으로 어머니 김복자에게 전답 6천 평과 염전 3정보를 사들였다. 집안 살림을 챙겨줄 친척을 집사로 두고 염전 일과 어머니 농사를 차질 없게 돕도록 했다.
“어머니, 당분간, 어머니를 뵈러 오지 못합니다. 만수무강하시고 일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피시고요. 예전처럼 고생하지 마세요. 이제는 시골에서 빠지지 않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고맙다. 꼭 큰 인물이 되어라.”
젊은 여자를 들어오게 해서 어머니 돕도록 했다. 금용은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에 다녀온 다음 행정고시에 응시할 준비를 시작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하고 씨름하고 복학한 다음부터 졸업할 때까지도 열심히 공부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역전 여관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1970년 3월 초순, 이금용은 성균관 대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1971년 4학년 때, 행정고시에 응시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국가공무원교육원에 입소해서 일정 기간 실무교육 받았다. 1972년 2월 하순, 그는 친지와 지인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이금용 사무관 영등포구청 사회복지과장이 된 것을 축하하네.”
“제가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주신 아주머니와 옥순씨 덕분입니다.”
“그거야, 뭐 자네가 똑똑해서 그런 거지. 아무튼 축하하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우리 옥순이하고 결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도 좋습니다. 하지만 옥순씨 생각이 먼저지요.”
“금용씨 저도 어머니하고 생각이 같습니다. 저하고 결혼을 해주세요.”
“그럼, 생각하고 말 것도 없네. 내일 시골 어머님을 올라오게 하고 상견례를 치른 다음 보름 후 결혼식을 올리세. 나는 물론이고 자네 형편도 결혼식에 특별히 초청할 친지나 지인도 많지 않은데 예식장에서 거창하게 식을 올리는 것보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치르고 식사하려는데 자네는 어떤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지금부터 아주머니를 장모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남편과 일찍이 사별하고 옥순이가 외동딸이네. 자네를 친아들처럼 믿겠네. 오늘부터 옥순이하고 합방하게.”
“엄마도 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청상과부가 되어서 저를 길렀습니다. 옥순씨 그동안 행정고시에 합격하도록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저는 돈 버는 일은 잘 모릅니다. 결혼하면 옥순씨에게 살림을 맡기고 열심히 공직에 전념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엄마가 벌어놓은 재산이 호텔 몇 개를 사도 남아요. 저는 결혼하자마자 교직을 그만두고 어머니가 미리 장만한 영등포 시장 앞 한길 건너 천여 평 부지에 호텔을 짓고 운영하려고 해요.”
“늦었다. 두 사람은 어서 올라가서 잠자리에 들어라.”
금용은 어느새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골목길 여관 주인아주머니 외동딸 옥순이와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창가 골목에 살면서 누구 못지않게 바람을 피우고 무질서한 생활에 젖으련만 아직 총각,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순수한 젊은 남녀였다.
“옥순씨, 행정고시 뒷바라지를 하느라 애썼어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한 일인데요. 영등포구청 사회복지과장 근무를 축하드려요.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말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근면하고 청렴한 공무원이 되세요”
역전 여관 주인집 딸 김옥순은 이금용에게 27년을 지켜온 순결을 바치는 첫날 밤이었다. 금용은 불이 꺼진 침대 위에서 옥순이를 두 팔로 힘껏 껴안았다. 흥분한 나머지 숨을 헐떡거렸다. 길게 뻗친 방망이가 팬티를 뚫고 그녀의 조가비를 향해 돌진했다. 자궁에 정액을 쏟아부은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큰거림은 황홀함의 극치였다.
1972년 3월 초순, 이금용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등포구청 사회복지과장으로 발령받고 근무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다. 그는 퇴근을 보류한 채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영등포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려고 문헌을 살펴보았다.
영등포는 경기도 시흥군 조그마한 동네였다. 영등포라는 이름도 영등굿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1899년 경인선이 깔리면서 이곳의 사정이 달라졌다. 경인선은 원래 인천- 노량진- 서울역이 계획되었다. 호우로 노량진이 물에 잠겨서 영등포에 임시역이 생겼다. 경부선까지 연결되어서 부산- 인천 물류가 영등포에 모였다.
일본인 거주 비율이 40%나 되었고, 부자들이 많았다. 한강과 하천물이 풍부하고, 경인 도로 깔리면서 교통이 편한 공업지대로 바뀌었다. 맥주 공장이 들어서고, 조선 피혁 주식회사, 도자기, 벽돌 공장이 문을 열었다. 1920년대에는 경성방직이 생기면서 조선인 공업의 상징으로 부각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군 위안부 공급지 역할을 했다. 1936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결정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경성부의 강남’으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격자형 도시계획으로 물레동 – 당산 일대에 주거지, 공장, 상업지구가 체계적으로 나뉘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가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다. 하지만 영등포가 도심지라고 하기에 너무 낙후되었다. 일본공장은 적산으로 한국민들에게 넘어갔지만 기술 부족으로 운영하기에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공장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 등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1963년 영등포공장들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상업지구와 무질서한 주거지로 남았다. 영등포역 쪽방촌 거주민 대부분이 공중화장실을 사용했고, 절반이 넘는 사람은 휴대용 버너로 취사를 해결했다.
6.25 한국전쟁 때 파손된 영등포역사는 1965년 재건되었다. 우리나라는 1962년∼ 1965년까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6년∼ 1970년까지 제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 1971년∼ 1975년까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영등포 시장 주변에 유흥업소와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이금용은 사무실에 앉아서 영등포에 대한 문헌을 살펴보는 동안 밤이 점점 깊어 갔다. 유리창 너머로 봄을 재촉하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책상에 놓인 라디오를 켰다.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 오는 사랑의 불길,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노래가 흘러나왔다.
2절이 계속되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그는 지나온 시간 속에 묻혀가는 고비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금용은 그녀가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손목도 잡아보지 못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추억 속에 그려진 한 편의 환상에 불과했다.
이금용은 국민 학교 동창 고비선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마음이 설렜다. ‘비선아, 국민 학교 동창 이금용이다. 다음 주 토요일, 결혼한다. 행복해라.’ 중얼거렸다. 야심한 시간에 봄비가 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는 두 눈에 이슬이 맺히게 한 노래는 1962년 가수 오기택의 데뷔곡‘영등포의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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