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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명예54회)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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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원
2013-01-14 13:28 237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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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또래 세대들은 사내녀석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던 나는 어려운 일이 참 많았지만, 울었던 기억은 좀체 없다. 그랬던 내가 그 날은 마구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7년 전 일이다.

서울
예술대학교 겸임교수 임용에 최종학력 증명서가 필요했다. 내가 다녔던 서라벌예술대학교가 중앙대학교로 편입되어서, 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 총무과를 찾아가 서류 신청을 했다. 잠시 후 여직원이 서류를 내주면서 팬인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환영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생님 졸업을 못하셨나요? 방송학과 1학년 수료라고 되어 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아, 네네~”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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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정도 병이라고 왜 졸업을 안 했느냐, 재수강을 신청하고 등록금을 내면 졸업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그 직원은 내가 졸업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해서 한 좋은 뜻이었다. 그 순간 긴 시간 참아왔던 내 서러움 보따리의 실오라기가 풀린 것처럼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난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햇살은 마냥 눈부시고 캠퍼스는 싱그러웠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나무로 가려진 벤치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안도가 돼서인지, 엉엉 꺼이꺼이 울음이 마구 터져나왔다.

1960년대는 가장이 직업이 있어도 살기 고달픈 시절이었다. 경기중과 서울대 광산학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좌익사상을 가져 6·25 때 월북했다.
어머니와 남동생, 나, 이렇게 남은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귀하게 자란 탓인지, 어머니는 생활능력이 없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10여가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인심이 좋아 쌀도 밀가루도 연탄도 빌려주곤 했다. 더 이상 빌릴 형편이 못 되었을 때 중1인 내가 돈벌이에 나섰다.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기영이 아저씨가 부지런한 분이어서 납품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학교도 빠지면서 그 아저씨의 심부름을 했다. 아침을 굶어 힘들었지만 일당을 받아야 쌀과 연탄을 살 수 있었기에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판이라 학비까지 대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다니던 고명중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다가 훗날 나의 대학등록금까지 해결해주는 동창 이석태가 다니던 동대문중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석태의 작은아버지가 당시 동대문중학교 관계자였다.

이후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내가 덕수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합격한 걸 보면,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 낮엔 일하고 밤엔 야간대학을 다니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계획대로만 살아지지 않는다더니, 큰 꿈을 품고 들어간 덕수상고를 나는 또 중퇴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려운 환경의 고학생들을 위한 지방의 대안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대학을 가야겠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욕심으론 당시 신설된 고려대
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었다. 캠퍼스에서 지식과 지성도 쌓고 싶고, 다양한 동아리 활동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의 사랑이야기처럼 매력적인 여학생과 아름다운 사랑도 하고 싶었다.

입시 준비는 고사하고 등록금을 구할 형편도 아니었던 내게 그 꿈은 헛된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중학교 동창 이석태가 등록금을 빌려주어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2년제 초급대학이던 서라벌예술대학은 신입생 선발에서 시험성적보다는 예술적 재능을 우선시했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성우 시험에 합격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이어졌다.

하지만 성우가 됐다고 금방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2학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만 보면 졸업장을 주겠다고 했지만 난 포기했다. 어려운 환경이 눈물나도록 서러웠지만 참았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그 날,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남루한 환경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를 다녔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경향신문(201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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