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회 백두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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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기행
불함산 솟아나는 문화의 샘이
흐르고 흐르다가 사방에 퍼져
긴 세월 꽃이 피고 여름 맺으니
빛나는 우리 조국 날로 새로워.
"不咸이란 卽 'ᄇᆞᆰ'의 譯音이오, 'ᄇᆞᆰ'이란 卽 光明이오 神明이라. ... 故로 不咸山은 卽 'ᄇᆞᆰ의 산'이오, 天神의 居處하는 聖山이라.“
ᄇᆞᆰ(신)의 산, 즉 不咸山(백두산)에서 솟아난 문화의 샘이 사방으로 흐르고 흘러 긴 세월 꽃을 피우고 여름(열매)을 맺어서 마침내 우리 조국을 빛나고 새로운 문화의 중심으로 삼고, 만주, 몽골, 일본, 동시베리아까지 문화가 퍼져나갔다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노래의 가사로 만든 것이 바로 덕수상고의 교가이다. 校歌라기 보다 國歌에 가까운 노래다.
우리는 우리 조국의 거대 문화 담론을 암송하다 우리의 맹세를 소리 높이 외친다.
덕수 덕수 나의 사랑 내 학교
예서 자란 우리 학우들
닦은 바를 저바림 없이 발휘하자
굳게 맹세를 하세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의 가장 오래된 옛 이름인 《산해경》의 '불함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아시아 문명의 원류를 설명하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5년)을 제창했다. 이 사상은 그의 백두산 기행문인 《白頭山覲參記》(1927년)를 관통하는 핵심 논리로 작동했다.
교가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웅장하다 싶었는지, 아니면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지 덕수고의 교가는 교가스럽게 이미 바뀌었다. 인공지능에게 물으니 덕수고 교가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삼각산 웅장하게 우뚝 서 있고 한가람 푸른 물은 흘러 넘치네
이 땅에 높은 인재 길러 내어서 조국의 밝은 미래 이루어 나가자
빛나라 우리의 덕수 덕수 덕수 영원히 빛나리라 우리의 학교
우연찮게 우리 학우 몇이서 백두산 유람에 나서게 되었다. 비록 우리의 땅이 아닌 중국의 땅을 밟고 오르는 여정이지만 우리 민족의 영산을 찾아가는 영광으로 벅찬 기운이 솟구친다.
육당은 백두산 천지에 신이 강림하는 광경을 천지창조의 장면처럼 장엄하게 묘사했다.
"백두산 상에 편운(片雲)이 뜨자마자 천지가 문득 먹물에 들고, 우레가 우르르 번개가 번쩍하며 모진 바람, 사나운 비가 세계를 단번에 부숴버릴 듯 할 때 여기 인드라의 무서운 형모(形貌)가 나타나지 아니하였을까?“
육당에게 백두산은 자연물 山이 아니고 신이 강림한 신성한 神殿이고 인간 의식과 문화의 經典이며 바라고 기댈만한 ‘念願’이었다.
"白頭山은 한마디로 槪括하면 東方 原理의 化囿(화유)입니다. 東方 民物의 가장 커다란 기댈 對象이요, 東方 文化의 가장 緊要한 核心이요, 東方 意識의 가장 높은 根源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우리 민족의 영산이 2024년 유네스코 지질공원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등재되어 백두산이라는 이름까지 빼앗길 판이다. 중국 입국 심사원이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백두산이라고 답했더니 창바이산? 이라고 되물었다. 나는 다시 백두산이라고 답하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육당은 1926년 7월 26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기차, 자동차, 도보 등을 거쳐 8월 4일 백두산 정상과 천지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무산, 회령, 청진 등 함경도 일대를 경유 및 탐방하며 8월 21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약 27일간의 백두산 탐방 기록을 《백두산근참기》로 남겼다.
김창선 부부의 주선으로 우필구 부부와 김갑동 이병수 유한길과 나 8명은 2026년 8월 24일부터 29일까지 백두산 탐방 기회를 얻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가는 길에 集安의 고구려 유적 장수왕릉(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 환도산성을 둘러보았고, 오는 길에 延吉 龍井의 명동촌 윤동주 생가를 돌아보았다. 우연히도 우리들의 백두산 여행은 육당의 백두산 탐방 100주년 기념 탐방이 되었다. 육당은 우리의 국토를 딛고 백두산에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중국의 땅을 딛고 정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天池를 만나는 일은 맘먹는다고 누구나 아무 때나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육당은 百頭大天王의 허락을 받고 천지를 마주하며 ‘대백두 대천지 찬덕문’을 올리며 신성한 제의를 치렀다.
"一心으로 百頭天王께 歸命합니다.
우리 種姓의 根本이시며
우리 文化의 淵源이시며
우리 國土의 礎石이시며
우리 歷史의 胞胎이시며
우리 理想의 支柱이시며
우리 運命의 酵母이신 百頭大天王前……“
우리들의 천지 알현도 엄격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우리는 사흘에 걸쳐 백두산 西坡를 시작으로 南坡 그리고 마지막으로 北坡를 올라 천지를 세 번 알현할 계획을 세웠다. 서파 남파 북파는 중국식 호칭이며 坡란 고개, 비탈을 말한다.
서파로 오르기로 한 8월 26일 새벽, 우레를 동반한 폭우가 잠을 깨웠다.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는 분명 百頭大天王의 不許의 전조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순응 모드로 바꿨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아침밥을 먹을 때가 되니 비가 그쳤다. 잔뜩 찌뿌린 날씨이지만 感之德之다.
우선 우리 전용 56인승 버스로 산 중턱의 환승장까지 올라가서 중국 당국이 관할하는 세계자연유산 지질공원관리소에 여권과 예약 증서를 제시하고 공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올라갔다. 산 상층부에서 다시 소형 버스로 갈아타고 정상 아래 1442 계단 입구에서 내려 다리 근육과 심장의 기어를 가속해서 천지 알현을 기원하는 마지막 고행을 마치고 天池의 顯現을 기다려야 한다.
산을 오르는 동안 길 옆은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원시림이다. 鬱鬱蒼蒼한 숲은 쓰러진 나무, 기운 나무, 검은 이끼가 덕지덕지 낀 나무들이 엉켜서 자연적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고 있었다.
백두산은 자작나무의 산이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자작나무가 산 아래에서부터 산 위까지 식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빽빽한 樹海 가운데 하얀 자작나무는 숲에 긴장감과 리듬감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白頭山은 흰눈(白雪)이 쌓인 白일까, 흰 자작나무(白樺)의 白일까?
자작나무는 冬土의 나무다. 북위 45도 위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마고원 이북에서 자생한다. 남한에 있는 나무들은 자작나무와 닮은 거제수나무 또는 사스레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요즈음 자작나무 숲의 인기가 치솟아 자작나무를 많이 심는다.
자작나무는 시인들마다 별명을 붙여 부른다. 숲속의 귀족, 숲의 佳人, 겨울 숲의 귀부인, 북방 미인, 순백의 신부.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자작나무는 17~20m까지 웃자라면서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는 엄격한 堅忍主義者다. 무리 지어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옆의 나무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아래 가지들을 스스로 쳐내고, 그 쳐낸 자리에 딱정이로 앉은 까만 상처들로 시퍼런 서슬 맺힌 恨처럼 평생 烙印 찍혀 산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한정된 영양분을 빛에 가까운 줄기에 우선 배분하여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서 잔가지를 도태시켜 落枝하는 것이다.
자작나무는 기름 먹은 껍질이 약 열 겹 정도 겹쳐있다. 기름 성분이 있어 자작자작 잘 타서 자작나무다. 1973년에 발굴된 경주 천마총의 天馬圖는 47겹을 덧붙인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려졌다. 수피의 기름 성분이 살충, 살균, 항균, 방습 작용을 하여 1500여 년을 썩지 않고 빛을 보게 되었다. 고로쇠처럼 수액을 내 먹기도 하고, 자일리톨 껌을 만들기도 한다. 시인 白石은 자작나무를 白樺라고 했다. 자작나무로 불을 밝히고 서약을 하는 것이 樺燭 즉 결혼이다. 樺는 華이다. 지금은 華燭으로 쓴다.
백두산 아래쪽 잡목림 지대를 지나 1,500m 고지 언저리로 들어서니 침엽수림 지대가 나온다. 잡목림 지대와는 달리 수간 거리가 넓어졌고 가지를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수형이 눈에 박힌다. 가문비나무, 입갈나무(이깔나무), 분비나무가 주종이다. 가문비나무가 우산살처럼 비스듬히 아래로 뻗은 가지의 끝을 살짝 쳐든 수형은 날개를 살짝 벌리고 걸어가는 펭귄 모습 또는 늘어진 치마의 양 끝단을 살짝 잡아 올린 발레리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백두산 소나무로 궁궐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소나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나무는 드물었다. 침엽수 옆에도 자작나무가 적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높은 고도에서도 잘 자라는 모양이다. 침엽수 지대를 지나면 자작나무만 남는다. 2,000m 언저리에서는 늘 곧은 자세로 서 있던 자작나무가 강풍에 시달리며 굵은 주간과 가지 모두 이리저리 구부러져서 뒤틀린 분재처럼 서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드디어 수목한계선 2,100m 즈음에 이르니 나무가 사라지고 초원 지대로 변했다. 6~7월이었으면 야생화 꽃밭이었을 초원은 그냥 풀밭이었다. 게다가 비마저 맞았으니 비에 젖은 생쥐마냥 초라한 풀밭이었다. 곧이어 버스가 멈추고 1442계단 앞에서 내렸다. 이번 탐방에서 가장 난코스다. 천지 알현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이딴 고행쯤이야 이미 각오한 바이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열심을 내어 걸었다. 안개와 구름이 산 위로 계속 밀려 올라 갔다. 중간중간 초록빛 등성이가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으나 천지 조망 데크는 선점자들의 차지였고 사람 뒤통수만 보였다. 천지 알현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리저리 끼어들 틈을 찾아서 발뒤꿈치를 들고 내려다보니 신성한 천지는 안개와 구름에 덮혀져 있다가 바람이 안개를 몰아가던 잠깐의 순간 동안 모습을 드러냈다.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 한 컷을 건졌다. 본전은 건졌다. 이제 나의 얼굴을 천지와 겹쳐 찍어야 인증샷이 되는데 인파와 구름이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후퇴하여 인증샷을 눌러줄 갑동을 찾아 나섰다. 역시 동기 카페 카메라 감독은 달랐다. 갑동은 조망 데크 제일 끝머리에서 이미 촬영 장소를 확보하고 있었다. 친구들을 모두 불러 구름이 잠깐 걷히는 순간을 몇 차례 포착해서 저마다 인증샷을 찍었다. 이젠 본전 이상이라 생각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맑은 날을 보는 것도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데 병수는 세 번 올라 세 번 모두 맑은 날에 산 아래를 조망했으니 9대가 덕을 쌓은 것이고, 오늘 천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9대가 덕을 쌓은 자기의 덕분인 줄 알라고 공치사를 늘어 놓았다.
목표를 달성했으니 데크에 주저앉아 컵라면과 햇반을 꺼내 점심 식사를 했다. 구름은 더 이상 물러날 기미가 안 보여서 마지막으로 옆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맞추는 사이 다시 구름이 봉우리를 가려 구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하산했다.
8월 27일 南坡 탐방일이다. 북한과 인접한 남파는 하루 입장 인원이 2,000명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 인파에 치이지 않고 조용하게 천지를 알현할 수 있다. 천지를 조망하는 정상부의 고도가 서파, 북파에 비해 낮아 안개가 낄 확률이 적고 맑은 천지를 볼 확률이 가장 높다.
그런데 百頭大天王님은 오늘도 不許狀을 보내셨다. 병수의 9대 덕에 오늘 날씨는 최상의 맑음인데 불허라니 너무하다. 남파 천지 부근에 29일까지 공사가 있어 입장 예약이 취소되었다. 이유도 변명도 없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예약 취소 문자 하나면 종결이다. 항의할 곳도 대상도 없다. 오직 순종만이 허락된 미덕이다. 그래 하늘이 내리는 통과의례려니 하고 바로 순응 모드로 바꿨다. 하늘의 연못을 땅의 인간이 쉽게 보리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지.
우리의 전세버스를 타고 환승장으로 가서 세계자연유산 공원으로 입장하고 공원측의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도로는 철책을 따라 올랐다. 가만 짐작하니 朝中境界 鐵柵이다. 철책은 개천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개천이 아니라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압록강이다. 철책 너머 압록강을 포함한 땅이 북한의 땅이다.
백두산의 朝中境界는 천지를 반으로 나누고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 이참에 백두산 국경 문제를 대충 공부했다.
백두산 국경의 문제는 백두산정계비에서 출발한다. 1712년(淸 강희51년, 朝鮮 숙종38년) 청과 조선 관리들이 백두산에 올라 실사하여 거의 청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경계를 정하고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의 분수령에 경계비를 세우는 것[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으로 명기하고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 남동쪽 4km 지점(2,200m 고지) 分水嶺에 세워 놓았다.
이마저도 1881년 청이 간도 개간 사업을 추진하며 토문(土門)과 도문(圖們)의 중국 발음이 같으므로 토문강은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조선은 만주 내륙의 송화강의 상류인 토문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탈취한 일본은 간도 지방에 통감부 출장소를 두어 조선 땅으로 관리하다가 1909년 돌연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일본 국경수비대에 의해 백두산정계비가 멸실되고, 그 내용이 탁본으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1930년 백두산을 탐방하고 《白頭山登脊記》를 써서 조선일보에 연재한 안재홍은 멸실되기 전 분수령에 서 있던 백두산정계비를 둘러보고 아래와 같이 썼다.
”이 비석이 서 있는 꼭대기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수십 간 떨어져 분수령의 오른쪽 기슭에 계곡이 있다. 담수가 수척 직경의 샘물에서 솟아나 압록강의 근원을 이루었다. 동쪽으로 고개의 왼편 기슭에는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토문강물이 시작되어 이깔나무 삼림 속을 돌아 멀리 만주 돈화현의 서북으로 흘러간다. ... 이 정계비를 중심으로 좌우 5백 미터의 사이에는 50미터 정도 쌓인 돌을 두어 경계를 삼았다. 이 적석과 적석이 마주 닿는 선을 그어 길게 뻗으면 서쪽은 압록강의 근원에 닿고, 동쪽은 토문강에 닿아 앉은뱅이로 살펴보고 소경으로 만져 보더라도 두말없는 국경이다.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 서서 이곳을 보면 시냇물이 흘러가는 자국이 또렷하고 명백해서 ‘동쪽으로 토문이 된다’는 비석의 글 앞에 군소리나 개소리를 안 할 자리다.“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에서)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주은래와 김일성이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의 섬과 沙洲의 분할 근거를 제시했다. 1964년 3월 20일 북경에서 陳毅와 박성철이 천지분할은 북한이 54.5%, 중국은 45.5% 점유하는 '조중변계의정서'에 서명하였다. 이 의정서로 백두산 천지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천지 방문이 허락되지 않은 오늘 갈 수 있는 한계선은 악화쌍폭이다. 남파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폭포는 자그마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니 할 일이 없어 다시 버스에 올라 하산했다. 하산길 중간에 용암이 흘러 쓸고 내려간 자리에 압록강 상류의 침식작용으로 움푹 파여 형성된 압록강 대협곡을 구경했다. 중국측 언덕에서 내려다 보지만 정작 협곡은 북한의 땅인 듯하다. 천지를 알현하기 제일 좋은 날씨에 천지를 보지 못하고 안타까운 하루를 보냈다.
8월 28일 백두산 탐방 마지막 날이다. 北坡로 올라가서 天池를 알현할 예정이다. 일기예보는 약간 흐리지만 천지 관람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 드디어 百頭大天王님께서 오늘 천지 알현을 許可하시리라는 예감이 왔다. 우리 전세버스를 타고 二道白河 장백산 세계자연유산 환승장으로 갔다.
이도백하 환승장에 내리자 거대 복합 건물이 버티고 있다. 지난해 7월 개장한 대형 테마파크 ‘창바이산 金1172’다. 중화민족의 일부인 여진족의 金나라가 장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걸 강조하고, 1172는 금나라 세종이 백두산 산신을 흥국영응왕으로 책봉한 연도다. 백두산을 중화민족의 聖山으로 분장하여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중국에 완벽하게 편입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우리는 건너 띄었지만 테마파크 내 천지극장에서는 압도적 영상으로 금나라 황실 문화와 백두산 광경이 상영된다고 한다.
북파 세계자연유산 지질공원으로 입장하면 공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주봉 승차 정류장에서 내려 10인승 소형승합차로 갈아타고 지그재그 커브길을 18번 돌아서 전망대까지 간다. 올라가는 길 양 옆에는 서파에서 보던 자작나무와 침엽수의 식생이 그대로 나타난다. 소형지프차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갈지자로 꺽어져서 위험해 보였으나 창가에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은 모두를 황홀경에 빠뜨리는 듯했다.
서파와는 달리 초원에는 아직 야생화들이 무리를 지어 작은 꽃송이들을 흔들며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볼 시간은 없었으나 언뜻 보기에 부처꽃, 곰취꽃, 화살곰취, 투구꽃, 바위구절초, 큰오이풀이 보였으며 무엇보다 천지 주변에 식물이 전혀 자라지 못하는 모래땅에 듬성듬성 한 무더기씩 피어난 연노랑색 두메양귀비는 신비 자체였다.
드디어 정상 관리소에 도착했다.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최고의 날씨다. 산 아래에 펼쳐진 흰 구름은 마치 먼 설산을 보는 듯 아름다웠다. 지금부터는 카메라를 아무 데나 향해 눌러대도 바로 달력 사진 감이다. 9대가 덕을 쌓아 반드시 천지를 볼 거라는 병수의 장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눈을 들어 천지 방향 언덕을 바라보니 수천 명의 인간띠가 아스라이 보인다. 모두 천지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사진을 담으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지를 향한 조바심도 잠깐이고 서서히 전진하는 줄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천지 앞에 섰다.
눈이 부셨다. 입이 열렸다. 행복감이 몰려들었다. 익히 알고 있던 천지의 모습이고, 기대하고 열망하던 천지였건만 막상 알현하는 순간 나의 감정과 지식이 무장 해제되었다. 순수 감탄만 터져 나왔다. 나의 어설픈 감정과 짧은 표현으로 이 장엄한 순간을 담을 수 없어서 《白頭山登脊記》의 안재홍이 천지를 마주하고 쓴 글을 빌려 온다.
”검푸른 빛을 진하게 드리운 천지의 물이 그야말로 천지 석벽의 깊고 깊은 속에 고요히 담겨 수면의 깨끗함이 거울같이 곱다. 蒼古하고 검푸른 바깥 둘레 산의 천길 깍아지른 벼랑이 火口의 본색대로 사방 둘레에 치솟았다. ... 아득하게 바라다만 보되 天長地久 1만 년에 언제나 가볼 길 없는 양 텅 비고 아득히 넓으며 아스라하고 아득한 경개! ... 대백두의 장엄하고 드넓은 광경은 마치 色相의 세계를 완전히 초탈하여 말 그대로 神洲帝鄕에 넌지시 노니는 듯 逍遙遊의 참된 경계를 이제야 체득할 것이다. 아아! 숭엄하고 장려한 큰 포치이다.“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에서)
천지를 오감으로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카메라를 찍어대느라 손발이 바빴다. 서파에서 보는 천지는 거의 한 방향 각도에서 보는 것이라면 북파에서 보는 천지는 다양한 각도에서 다채롭게 천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천지의 동서남북 봉우리를 모두 건너다 볼 수 있다. 우리는 북파 2,660m의 天文峰에 서서 아득한 천지의 景槪를 角度별로 바라보며 찍고 또 찍었다. 나의 수십 장 천지 사진은 모두 모양이 다르다. 찍는 장소의 바위가 천지의 모양을 결정한다.
안재홍이 ‘望天喉의 아가리’로 표현한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는 큰 것만 총 16개로 분류하며 최고봉은 해발 2,744m인 兵使峰으로 북한에 속해 있으며, 북한에서는 장군봉으로 부른다. 삐죽빼죽 작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검게 솟은 대봉우리들은 천지를 향해 깍아 지른 절벽으로, 무너진 비탈로, 검푸른 이끼를 두른 녹색 정원으로 장엄한 아우라를 분출했다. 봉우리에 대한 안내장이나 안내판이 전혀 없어서 봉우리 이름도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의견을 내어 동서남북을 가늠할 뿐이다. 북한 쪽에서는 천지의 물가로 내려가는 길이 정비되어 있고 물가 옆에 작은 막사도 있었다. 문제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백두산 천지를 함께 둘러보던 장소도 어림해 볼 수 있었다.
제각각의 높이로 육중하게 솟은 부정형의 바위 그릇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한 옥색의 엄청난 물을 담고 있었다. 이 물은 그냥 물이 아니다. 불함산에서 솟아나는 문화의 샘이다. 긴 세월 사방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대한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文化의 淵源이며 國土의 礎石이며 歷史의 胞胎이며 理想의 支柱이다. 천지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 호수로 전체 면적은 약 10 ㎢, 호수 주위 길이가 13km, 평균 수심이 204m이다.
오늘은 천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백두산 靈峰 위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도 백두산 검은 봉우리들과 조화되어 신비한 靈氣를 띤 빛으로 감동을 주었다. 그렇다. 天池는 하늘과 물의 결합이다(天池 = 天 + 池). 하늘 없는 물도, 물 없는 하늘도 천지는 아니다. 그리 생각하면 서파에서 본 안개 속의 천지는 하늘 없는 물이었으니 반쪽 천지라고 하면 지나친 괴변일까?
오늘 최상의 조건으로 천지 알현을 하고 나니 지난 이틀 동안 百頭大天王께서 하루는 비구름으로, 하루는 예약 취소로 애간장을 타게 한 모든 통과의례의 보상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에 감사하고 행복한 발걸음으로 백두산과 천지를 이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더 바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백두산에서 트레킹을 하며 대자연에 파묻혀 보고 싶다. 백두산 산정에서 별을 세며 야영을 하고 싶다. 중국이 아닌 우리 땅에서, 내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 북청에서 개마고원을 넘어 삼지연과 천평과 분수령을 넘어 장군봉을 오르고 싶다. 희망도 못 하냐?
행복한 마음을 가득 안고 다시 미니 승합차를 타고 유명한 장백폭포로 향했다. 장쾌한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고 충만했다. 이어 銀還湖(소천지)와 綠淵潭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은환호는 동네 공원의 작은 호수에 불과하여 소천지라는 명칭은 과하다.
이번 백두산 여행을 주선한 창선에게 감사하고 덕수 동기들 간의 멋진 여행은 오래 기억의 창고에 머무를 것이다. 애국가에 나오고 교가에도 나오는 백두산(不咸山)을 다녀온 자부심도 오래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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